저는 싱글맘, 정확하게 미혼모에요.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저한테 저 어린 딸 하나 남겨두고 생의 마지막을 준비 하랍니다...
정말 얼마나 목놓아 울었는지... 왜 그렇게 어리석고 멍청했었는지... 가슴을 찢고 후회도 해봐도 내 뱃속에 죄없는 생명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지요.
혼자 아이를 낳았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그 날보다 더 많이 울었던것같네요. 세상에서 그렇게 내 편하나 없어서 외롭다 느꼈는데 내 피붙이가 하나 생기던 그 날이잊혀지지 않네요...
오늘은 날이 참 덥네요. 이런 날은 잠도 잘 안와요^^ 그래서 썩 유쾌하진 않지만... 제가 살아온 이야기나 조금 해볼까 해서요.
생일 안 지나서 만으론 30살... 아직 할일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아직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창창한 30대입니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11살 딸을 가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엄마입니다.
저한테 저 어린 딸 하나 남겨두고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랍니다.
저는 흔한 말로는 싱글맘.. 정확하게는 미혼모입니다. 글쎄요...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저 이래서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었어요...'
글쎄요...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저 이래서 이렇게 살수밖에 없었어요... 하는 변명밖에 안되겠지만... 오늘은 덤덤하게 고해성사 하듯 풀어놓고 싶네요.
아버지는 흔히 얘기하는 한량이셨어요. 그 덕에 반대하는 결혼을한 어머니는 눈물마를 날이 없으셨지요.
자식은 줄줄이 사탕처럼 넷이나 낳으신 덕에 사춘기 시절 엄마는 늘 남의집 파출부 일을 하시며 학비 대시던 기억 밖에 없네요.
그 와중에 아버지는 여자를 좋아하셨어요. 미닫이 문으로 나눠진 두칸짜리 방에 여섯식구 옹기종기 모여살던 그 시절에 내연녀를 집에까지 끌어들이셔서 미닫이 문 하나 사이에 두고 함께 잠을 잤던 기억도 있네요.
끔찍했고 지옥 같았습니다. 가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모질게 독설이라도 퍼붓고 매질을 엄마대신 맞아줄 독한 자식은 우리 집에 저뿐이였네요.
이를 갈면서 성공하겠다는 욕심뿐이없었던 시절이였답니다.
그래도 오로지 자식들만 바라보고 성실하게 살아오신 어머니덕에 우리 사남매 견뎌낼수 있었답니다. 어머니는 저희에게 삶의 이유였으니까요.
고3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는 가족들은 나몰라라 생활하시던 어느 날.. 엄마가 소화가 안 되신다네요. 끙끙 앓다 도저히 안되서 병원에 가셨는데...
별다른 이상도 없으시구... 그러다 삼일만에 일이 터졌습니다. 갑자기 어머니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수술 해야 한다고.... 아무래도 암 인것 같다고...
그래요. 의사가 자꾸 수술을 권하고 아버지는 안계시고,, 이모가 오셔서 수술에 들어갔는데... 1시간도 안되어 수술이 끝났습니다.
전이성 위암..간..난소 자궁 뼈 뇌 대장 췌장... 그 더러운 암덩어리가 어머니의 온몸에 퍼져있다더군요.
수술은 할수없다고... 편히 보내드리라고.... 아.... 그 때 그 기분은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확하게 두 달 만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고3 유난히 덥던 그 여름... 거짓말처럼... 내 삶의 이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공부를 썩 잘 하지도 못했던 저였지만,,, 그 이후로 모든 일에 의욕이 없어졌던 것 같네요. 당연히 입시에도 미끄러지고, 마음에도 없는 재수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일주일 만에 새로운 여자를 집에 들이셨습니다.
집이 싫었죠. 아직 집안 곳곳에 엄마의 손길이 묻어있는 그 집에 새로운 안주인이 있는게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자연히 밖으로 걷돌게되었죠.
뒤늦게 자식들이 마음을 못잡고 방황하자 아버지께서 자식들에게 손찌검을 해가며 아버지노릇을 하려고 하시더군요. 저는 맞아죽기 싫어서 그 집을 떠났습니다.
집을 나와서 안해본 일이 없었어요. 낮에는 고깃집에서 허리한번 못펴고 아르바이트하고, 저녁에는 커피숍에서 일을 했어요.
그래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서 주유소 알바까지 해가며 생활했습니다.
첫 월급을 받기전 한달 동안은 거리에 나와있는 배달음식 그릇까지 손을 대면서 살기 위해 몸부림 쳤습니다.
그러다가 아이 아빠를 만났어요. 나이 차는 좀 났지만... 그 시절에 저는 하루라도 마음편하게 먹고 자는게 절실했습니다.
나이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죠. 좋은 사람이였습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이 사람정도면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도 괜찮을거란 생각이 들었고
21살의 생각으론 그게... 그때의 그 선택이 최선인줄 알았습니다.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먼저 살림을 차리게 되었고... 그 덕에 아이까지 생겼습니다.
아이가 생겼다고 기뻐하며 제가 얘기하자... 지우라고..하더군요. 이해할 수 없어서 '왜?' 하고 물었더니 아이가 싫답니다.
낳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입양을 보내버리겠다네요. 왜 그러냐고 왜 아이에게 그러냐고 따지고 물으니 이미 가정이 있답니다.
전 알지도 못하는 사이 첩이 되어버린거구요.. 남의 가정을 파탄 낸 천하의 몹쓸년이 되어있었습니다.
본처와의 사이에 다운증후군인 딸아이가 하나 있고, 자신은 장애를 가진 딸 뒤치다꺼리 하느라 자식이 싫답니다.
정말 얼마나 목놓아 울었는지... 왜 그렇게 어리석고 멍청했었는지... 가슴을 찢고 후회도 해봐도 내 뱃속에 죄없는 생명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지요.
혼자 아이를 낳았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그 날보다 더 많이 울었던것같네요. 세상에서 그렇게 내 편하나 없어서 외롭다 느꼈는데... 내 피붙이가 하나 생기던 그 날이잊혀지지 않네요.
아이를 키우던 그날 들은 하루하루가 좌충우돌 이였습니다. 여동생이 저와 제 딸 아이를 위해 돈을 벌어다 주고 뒷바라지를 해주었지요.
퇴근하면 동생과 육아책 봐가면서 아이 목욕시키고 이유식도 만들고... 지금도 동생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면서도 고맙고 뭐라 표현할 길이 없네요.
아이 아빠는 아이가 태어나자 자연스럽게 도망치듯 떠났어요. 양육비 생활비.. 아이 아빠 말대로 간통으로 우리가 고소 당할수도 있으니 그런거 요구말라더군요.
그런거 요구할 맘도 없었는데 참 씁쓸 하더라구요. 암튼....아이가 어린이집 갈 정도가 되자...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아이는 제 호적에 올리고... 저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우리 공주님의 엄마이자 아빠역할까지 충실히 해내기 위해 열심히 일했답니다.
젊고 열심히 한 덕에 혼자서도 아이하나 보란듯이 키울만큼 생활할 정도가 되었는데...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저도 친정엄마처럼 건강에는 소홀했던가 봅니다.
작년 3월... 근무중 너무 배가 아파서 병원엘 갔는데... 내시경을 해봐도 아무 이상이 없더라구요.
의사는 위염약을 처방해줘서 그것만 먹고 있었는데... 나아질 기미가 없더군요. 겁이 덜컥나서 온갖 병원을 다 찾아던것 같아요.
명치가 늘 아파서 소화기계통의 질병을 의심했었지만... 3월에 내시경을 했었기에 사실 소화기계통을 간과하고 있었는데...
도무지 안되서 다시 11월에 소화기내과를 찾아서 내시경을 했더니 의사가 다짜고짜 입원을 하라더군요.
입원 준비도 안해왔고 당장 입원을 할 형편이 아니라고 얘기하니.. 궤양이 심해서 출혈이 심한 상태라 경과를 지켜봐야겠다고 무조건 입원하라더군요.
학교에 있는 아이는 아이가 다니던 학원선생님께 좀 맡기고 입원을 했는데... 밤에 잠이 안 오더군요..
레지던트는 얼굴만 보면 보호자를 찾는데... 사람이 감이라는게 오잖아요. 동생이 병원에 와서 의사와 상담하고 돌아오더니....
"언니야...마음 단단히 먹어라. 위암 이라는데...상황은 좋진 않단다."
엄마와 같은 병.. 거짓말 같은 지독한 운명은 다시한번 저를 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이성 위암이라는 확진이 떨어지자마자 서울로 가서 유명하다는 병원엔 다 가본것 같네요.
한결같이 돌아오는 수술불가.. 항암요법은 본인의 선택.... 저 하나만 보고 있는 우리딸 생각에 복수가 차 올라 허리를 펼수도 없는 그 상황에서도 살아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젤로다와 옥살리플라탄으로 첫 항암을 시작하고 죽을 만큼 괴로워도 견디고 견뎠내요.
경과는 좋았습니다. 위에서 시작된 암은 간과 림프절 난소와 자궁 복막까지 다 퍼져있었지만 약효가 좋아서 종양의 크기도 많이 줄고 호호할머니처럼 굽어져있던 허리도 다시 자연스럽게 펴졌지요.
하지만 암은 지독하고 무서웠습니다. 8번째 싸이클 시작하기 직전 찍은 씨티 결과 난소와 자궁에 종양 크기가 다시 커져가고 있는걸 알게되었죠.
살기위해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할 결단을 내리게되었지요. 난소와 자궁을 다 들어내고.. 씨스플라틴과 캠푸토라는 새로운 약으로 다시 항암을 시작하게되었어요.
그리고 현재... 약 10개월간의 항암치료로 2싸이클만 더 해보고 항암을 쉬어보자는 말을 의사가 하네요.
전이성 위암환자의 기대 여명 6개월... 기적처럼 지독한 항암을 버티고 아직도 병마와 싸우고 있지만...
아직은 우리 딸에게 엄마가 너무나 절실하고 필요한 시기이고. 저또한 제가 겪은 아픔을 딸아이에게 대물림 하고 싶지않아서라도 이 병과 싸워 이길겁니다.
물론 긴 투병이 이어진다면 물질적으로든 마음적으로든 어려운 일이 분명 많이 생길테지만... 아직은 제가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지독한 이 끈 붙들고 있어야겠네요~
저보다 더 힘든 상황에 계신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우리 삶의 이유를 한번 떠올려보면서 다시 한번 힘내보자구요^^
~ 아고라에서 옮겨온 글 ~
<편집 후기> 이 글이 올려진 후 한 방송사에서 방송되었고 이 어린 아기 엄마는 지금...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아! ~~~ 홀로 살아가는 어린 딸에게 사랑이 풍성하신 우리 주님께서 늘 지켜 주시기를 뜨겁고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드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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